2020412, 28:18-20,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정용구 목사

 

초기 코로나 19와 관련해서 사람들이 염려하는 것 중에 하나는 자신이 만약에 코로나 바이러스 확진자가 된다면, 뭐 병원 가서 치료 받는 것은 그렇게 두렵지 않은데, 자신의 모든 사생활들이 공개되고, 그로인해 자신이 사는 집, 직장, 자주 가는 곳, 내가 만났던 사람들이 순식간에 자신으로 인해 폐쇄가 되거나 감렴 우려자로 되어지면서 피해를 주는 것이 더 두렵다고 합니다.

지금은 모든 국민들이 어느 정도 수준에서 이렇게 같이 겪게 되기에 그래도 이해하고 넘어가지만, 만약에 어느 특정한 일에 가담하거나, 잘못을 해서 얼굴이 알려지면 평생 회복되기 어려울 수도 있습니다.

최근에 우리 사회를 경악하게 만든 n번방 사건이라는 뉴스에서 텔레그램이라는 SNS 프로그램 안에서 수 많은 음란 동영상이나 범죄 행위를 저지른 조주빈이라는 사람의 얼굴을 전국민에게 공개하기로 결정했었습니다. 텔레비전에 그 얼굴이 공개 되었을 때, 목에 깁스를 하고 나타나서 저는 잡힐 때 경찰과 다투다가 다친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알고보니, 얼굴을 분명하게 공개하고, 숨기지 못하도록 경찰에서 그렇게 조치를 취했다고 합니다. 인터넷으로 전세계에 순식간에 전파되는 요즘 세상,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오랫동안 기억이 될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서 죽음을 당하실 때, 예수님의 죽은 시체를 달라고 했던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의 이름은 아리마대 요셉이라고 알려져 있습니다.

27:57-58을 보면 아리마대의 부자 요셉이라 하는 사람이 왔으니 그도 예수의 제자라 빌라도에게 가서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에 빌라도가 내주라 명령하거늘이라고 했습니다. 당시에 예수님은 이스라엘과 이스라엘을 지배했던 로마인들에게는 엄청난 사회적 이슈를 만든 사람이였습니다. 수 많은 사람들이 그를 따르기도 하고, 어떤 사람은 그를 죽이기 위해 말도 안 되는 법으로 죄를 뒤집어 씌워서 십자가에 못 박아 죽게 만들었습니다.

특별히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했던 제자들도 상황이 너무 다급해지니까 예수님을 부인했습니다. 다 도망갔고, 수제자라고 했던 베드로는 세 번씩이나 부인을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병 고침을 받기도 하고, 위로의 시간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때에는 그 동안의 예수님과의 관계를 밝히지 않았습니다.

십자가에서 무기력하게, 처참하게, 형편없이 죽는 예수님을 보면서, 그 어떠한 기대나 보상을 기대할 수 없는 상태였습니다. 죽을 사람은 죽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한다는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혹시라도 괜히 예수님과 관계가 있다고 나서다가는 같은 죄를 지은 공범으로도 몰릴 수 있습니다. 특히 이스라엘은 종교적 색채가 강한 민족이라 자칫 무리수를 두면 다 뒤집어써서, 이스라엘의 회당에도 출입을 제한 받을 수 있는 어려움을 당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 보면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예수님의 시체를 달라고 합니다.

그는 아리마대라는 지역 사람으로 산헤드린 공회원이였습니다. 이곳은 예루살렘에 있었던 하나의 회의 기관이였고, 유대인들에게는 최고의 중앙 재판소 역할을 하는 곳입니다. 이곳을 구성하는 숫자는 의장을 포함해서 71명인데, 의장은 보통 대제사장이 했고, 주로 제사장이나 종교지도자들, 율법 교사들로 구성이 되어 있습니다.

이를 통해 보면 아리마대 요셉은 나름대로 신분적으로는 기반이 잡힌 사람입니다. 그리고 부자라는 소개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빌라도에게 요청을 해서 허락을 받고 예수님의 시체를 찾아 왔으니, 당시 유다에 부임한 5대 총독으로 로마 사회에서도 중상류 귀족 가문인 빌라도와 이렇게 뭔가를 이야기 할 수 있다는 것은 아리마대 요셉이 꽤 영향력이 있던 사람이였다는 것을 보여 줍니다.

() 최근에 127조의 자산을 가진 미국 마이크로 소프트사의 빌 게이츠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전화를 걸어서 코로나 바이러스 퇴치 운동을 하자고 전화를 한 것이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부자 정도가 아니라 그 영향력이 엄청나기에 많은 사람들이 그의 전화 한 통화에도 집중을 합니다.

때로는 어느 정도 영향력이 있어도 고위 관료들을 만나기는 쉽지 않고, 절차들이 많고 복잡합니다. 저는 지금 해외에 있는 한국 선교사들이 이번 코로나 19로 갑작스럽게 한국에 돌아오고 있는데, 최근 정부 보건 당국의 입장이 해외에서 오는 사람은 무조건 14일 자가 격리를 해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28,000명의 선교사들 대부분이 한국에 집에 없습니다. 선교사 안식관도 한계가 있는데, 자가격리를 하려는 정부 기준이 있는데, 그것을 충족할 시설을 구하기 어렵습니다.

그래도 여러 곳들을 수소문해서 찾았습니다. 호텔을 통째로 내 놓겠다는 분도 계셨고, 기도원 시설을 제공하겠다는 분들도 계셨고, 자기의 집들을 내 놓겠다는 분들이 계셨는데, 안타까운 것은 정부 보건 당국이 승인을 해 주지 않습니다. 담당 보건소 직원들, 팀장들, 관할 구청이나 공무원들이 허락을 하는데 쉽지 않았습니다.

뭐 하나를 부탁하려고 하면, 자기 권한 밖이니 윗사람을 만나야 한다고 하고, 시기상 민감한 문제이니 더 윗사람을 만나라고 하고, 윗사람을 만나려고 하니, 아무나 만날 수 없고, 공문으로 연락을 해야 된다고 합니다.

그래서 내린 결론은 다음주 월요일에 한국선교사를 위한 대표성을 가진 저희 단체에서 국무총리, 외무부 장관, 보건복지부 장관, 질병관리본부장에게 공문을 발송하기로 했습니다. 보내기는 해도 결과가 쉽지는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같은 시대도 이렇게 쉽지 않은 일인데, 아리마대 요셉, 식민지를 당하는 나라의 백성이, 통치를 하는 로마의 최고 관료에게, 당시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된 예수님의 시체를 가져 나오는 것은 정말 아주 특별하거나, 뭔가 영향력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우리에게 보여 줍니다. 그 정도면 주위에 있는 사람들 역시 꽤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었다는 추측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지금 아리마대 요셉이 빌라도에게 요구하는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문제는 아리마대 요셉이 그 동안 쌓아 왔던 명성과 영향력과 관계에는 큰 도움이 되기보다는 오히려 큰 오명으로 남을 수 있는 상태라는 것입니다. 자칫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과의 친분이나, 관계가 사람들에게 알려지면, 얻는 것 보다는 잃을 게 더 많을 수 있는 굉장히 많은 위험 부담을 가진 일입니다. 그런데 아리마대 요셉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침이 없이 예수님의 시체를 요구해서 예수님의 장례를 치루는 일을 위해 기꺼이 그 부담을 짊어집니다.

 

왜 그랬을까요? 우리는 오늘 읽은 본문에서 그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27:57에서 그 답을 찾을 수 있는데, “그도 예수의 제자라라는 이 한 문장이 그 분명한 답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이기에 스승님인 예수님의 시체를 찾는 것은 그가 가진 영향력이나 관계나, 나중에 닥칠 어려움이나 위험을 생각할 필요 없이 분명하게 해야 될 일이기에, 그 어떤 손해가 와도 감당하겠다는 강한 의지로 진행을 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다른 곳의 표현을 보면 마가복음 15:43에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이 와서 당돌히 빌라도에게 들어가 예수의 시체를 달라 하니 이 사람은 존경 받는 공회원이요 하나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

요한복음 19:38에서는 아리마대 사람 요셉은 예수의 제자이나 유대인이 두려워 그것을 숨기더니 이 일 후에 빌라도에게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기를 구하매 빌라도가 허락하는지라 이에 가서 예수의 시체를 가져가니라라고 했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을 향한 표현들 가운데, “예수의 제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그 어떤 다른 신분이나 자신에 대한 소개보다도, 아리마대 요셉이 가장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바로 예수의 제자요,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는 주변 사람들의 지칭입니다.

그가 산혜드린 공회원, 부자라는 것을 떠나서,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에 대한 삶의 자세를 보고 사람들이 붙여 준 애칭입니다.

 

적용) 오늘 우리는 우리의 주변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어느 직장에서 일하는 사람, 어느 사업을 하는 사람, 아니면, 어디에 사는 사람, 아니면 적당히 뭐라고 부르기에 충분하게 우리의 삶을 보여 주지 않고 살지는 않았습니까? 아니면 누구의 아내, 누구의 엄마, 누구의 아빠로 불려 진 삶을 살았습니까?

곰곰이 돌아보시면 그렇게 불려 진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살았기 때문입니다.

 

) 제가 2002년에 동안교회를 부임했을 때, 재미있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제가 이력서를 내고, 공채로 청빙이 되었는데, 이 교회에는 저희 장모님이 오래 전부터 다니시던 교회였습니다. 제가 교회에서 활동을 많이 하고, 부목사로 많은 일을 해도, 교회를 이끄는 핵심 리더들 사이에서는 항상 저는 정용구 목사라는 부분도 있었지만, ‘권 권사 사위로 불려질 때가 더 많았습니다. 처음에는 좀 이상하다 싶었는데, 지금 돌아보니, 그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것은 저희 장모님은 동안교회에서 하루 두 번씩 예배를 드리십니다. 지금 80세가 넘으셨는데 지금 코로나 19라 교회를 못 들어가셔서 그렇지 새벽부터 매일 교회를 가시고, 매일 저녁에는 교회에 기도를 하시면서 주무십니다. 교인들이 무슨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저희 장모님께 기도 부탁을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저희 장모님을 부를 때에는 기도하는 권사님이라는 표현이 깔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사위인 저를 위해 기도를 꼭 많이 해 주시는 것 같지도 않습니다. 항상 담임목사님, 교구 목사님, 교회 파송 선교사님, 그리고 한참 뒤에 저희 차례가 옵니다. 힘들고, 위험한 선교지에서 일을 했어도, 자신의 딸이 제일 힘든 곳에서 일을 해도, 기도의 순서가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기도해야, 복을 제대로 받는다고 하셨습니다.

저도 그래서 장모님을 생각할 때, 제 아내의 어머님이라는 생각도 하지만, 저도 우리 장모님은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을 사랑하시는 분이다, 하나님 없이는, 예배 없이는 못 사실 뿐이다. 모든게 다 없어도, 하나님만 계시면 다 가지신 것 같이 평안을 누리실 분이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이것은 자신이 내가 기도 생활을 얼마를 하고, 내가 스스로 자랑해서 불려진 애칭이 아닙니다. 그의 삶을 보고 사람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사람들이 아리마대 요셉이 가졌던 지위와 부를 통해서 불려질 이름보다도, 더 많은 사람들이 불렀던 예수님의 제자, 하나님 나라를 기다리는 자라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우리의 삶이 이것을 증명하게 됩니다. 그저 자신만을 위해 사는 사람, 자기 가족만을 위해 사는 사람을 넘어서서, 오늘 이 귀한 애칭이 우리에게도 불려지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더욱 안타까운 것은 예수님의 제자의 자리에 있었고, 교회를 오래 다녔고, 예수님을 믿은지 오래 되었는데, 심지어 직분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냥 그렇게 지내는 삶으로 평가 된다면 그것만큼 안타까운 것은 없습니다.

저 사람은 믿음이 있는지 없는지 모르겠어, 어떻게 보면 교회를 다니는 것 같고, 하는 짓 보면 교회를 안 다니는 사람 같고.....”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얼마나 안타깝습니까?

오늘 우리의 삶이 이러한 안타까운 삶이 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누구에게 보여지기 위해서 사는 삶은 아니지만, 누군가에게 기억이 될 때, 하나님께 영광이 디는 사람으로 기억이 되어지는 삶을 살게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2. 오늘 본문을 보면 마 27:62-65을 보면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 함께 빌라도에게 모여 이르되 주여 저 속이던 자가 살아 있을 때에 말하되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 한 것을 우리가 기억하노니 그러므로 명령하여 그 무덤을 사흘까지 굳게 지키게 하소서 그의 제자들이 와서 시체를 도둑질하여 가고 백성에게 말하되 그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다 하면 후의 속임이 전보다 더 클까 하나이다 하니 빌라도가 이르되 너희에게 경비병이 있으니 가서 힘대로 굳게 지키라 하거늘라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이 본문을 보면 참 아이러니 합니다.

지금 제자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는 했지만, 대부분의 제자들이 다 도망을 갔습니다.

반면에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했습니다. “내가 사흘 후에 다시 살아나리라하신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대비해서 무덤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저는 이 아이러니한 모습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이번 코로나 19를 겪으면서 공교롭게도 사순절, 고난주간, 부활절인데, 많은 한국교회는 이번 코로나 19로 인해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과 부활을 이야기 하지 못하는데, 세상 방송은 제가 살아보면서 그 어느 때보다도 많은 사람들과 시간 속에서 교회에 대해서, 예배에 대해서 이야기를 합니다. 어제 뉴스에서도 부활절이라는 단어를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사용했는지 모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예수님의 부활은 믿지는 않지만 예수님의 부활을 기억하고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는 무엇을 하고 있냐?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무엇에 그렇게 많은 집중을 하고 있느냐? 라는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이 귀중한 부활의 믿음을 혹시 세상처럼 억만 하고 있지는 않은지?’ 라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단순한 기억은 우리의 삶을 변화시킬 수 없습니다.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시고, 죄인인 우리를 위해 대신 피를 흘리고 그 힘든 고통을 받으시고, 돌아가시고, 사망권세를 이기신 놀라운 능력으로 부활하신 그 일을 그냥 기억의 단계로만 지나치는 것이 옳으냐?라는 질문을 해 보게 됩니다.

그냥 기념일로 표시하여, 계란 먹고, 매년 지내는 그냥 그러한 날로 하기에는 너무나도 소중한 날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너무나 귀중한 날이고, 특별하게 기억하고, 우리를 위해 이 땅에 오신 주님을 기억하며, 이 땅에서의 삶을 재 다짐해야 하는 중요한 날입니다.

 

특별히 우리가 읽은 본문은 예수님이 죽으시고, 부활하셔서, 우리에게 다시 오셔서 주셨던 말씀입니다. 28:20을 보면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라고 하셨습니다.

 

4. 우리는 이 말씀이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지 않습니까?

초대교회 성도들은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시고, 하늘로 올리워 가셨을 때 이 말씀을 붙들고 기억했습니다. 그 혹독한 로마의 박해가 시작이 되어도 이 말씀을 붙들고 이겼습니다.

히브리서 11:33-35을 보면 그들은 믿음으로 나라들을 이기기도 하며 의를 행하기도 하며 약속을 받기도 하며 사자들의 입을 막기도 하며 불의 세력을 멸하기도 하며 칼날을 피하기도 하며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 전쟁에 용감하게 되어 이방 사람들의 진을 물리치기도 하며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들을 부활로 받아들이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심한 고문을 받되 구차히 풀려나기를 원하지 아니하였으며라고 했습니다. 그들은 어떠한 시련 속에서도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을 붙들고 이겨나갔습니다.

지금 코로나 바이러스보다 더 많은 어려움을 주었던 혹사병은 200년간 전 세계 인구의 1/4이 죽었던 시기도 있었습니다. 세계 1,2차 대전이라는 비극도 있었고, 우리나라도 일제시대, 한국전쟁 시기 등 어렵고 힘든 시기들이 있었지만, 그 위기의 순간에도 그리스도의 말씀을 붙들고 일어서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지금 코로나 19 이후의 여러 변화는 이제까지 우리가 경험한 변화와는 다른 상태로 상당히 많은 변화를 줄 것이라는 전망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활도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이고, 교회도 그렇고, 선교도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저희도 선교계 리더들과 향후 코로나 19 이후의 사태를 연구하고, 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미국과 유럽 일본이 이번에 방역에 무너지면서, 선진국의 지각변동과 리더십의 변화가 있을 것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말씀 드린 공유경제에게 비공유 경제, 특히 온라인 교육의 급성장과, 기존 교육시스템의 붕괴, 의료체계에 대한 많은 집중과 건강식품들에 대한 관심, 심리 상담의 절대적 필요, 특히 여행업의 변화로 미국 911 사태 이후로 공항 시스템의 변화에 이어, 이번 코로나 19 이후로는 여행자들의 이동 동선 공개 시스템 발달로, 외국에 사는 사람들의 부담, 특히 비공개국가에서 사역하는 선교사들이 많은 어려움을 겪을 것이라고 예측되고 있습니다. 특히 경제계에도 온라인 거래가 늘고, 사람과 사람이 거래하는 장소들의 점점 사라질 것이고, 이에 대한 고용감소가 이어질 것이라는 예측이 나옵니다.

긍정적인 부분도 있겠지만, 아주 어려운 시기를 당분간 지내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실제로 직장을 잃는 사람도 더 많고, 사업장을 폐쇄하는 사람들을 더 많이 접하게 됩니다. 또 살다보면, 어쪄면 코로나 19보다 더 어려운 일들도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결론. 코로나 19로 그 어느 때보다도 깊게 묵상하지 못한 사순절, 고난주간의 시간이였지만, 이제 본격적인 코로나 19이 이후의 시대를 살아가야 하는 우리들이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 주시고 가셨던 말씀인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이 말씀을 분명하고 단단하게 붙들고, 앞으로의 시기를 이겨나가야 합니다.

우리가 힘을 내야 합니다.

우리가 다시 일어서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이 이 위기의 시기를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의 말씀을 붙들고 이겨나가는 모습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이 말씀을 붙들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우리가 오늘 아리마대 요셉, 말씀을 기억하지 못하는 제자, 믿음 없이 말씀을 붙들었던 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을 잘 기억하면서, 우리의 삶이 온전하게 주님을 따르고 예배하며, 주님이 주신 말씀을 믿고, 그 말씀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가 부활의 주님을 기쁘시게 하고, 헛되지 않게 할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더 기쁨으로 예배하고, 주님을 알아가기에 힘쓰고, 삶속에서 주님을 위해서, 주님이 주신 말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라는 말씀을 부끄럽지 않게 붙잡고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