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3월 6일, 눅 15:3-7, "그 한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설교 동영상 - https://www.youtube.com/watch?v=Fb6SD9REYbY&t=83s
지난달 25일 호주에서 집을 나가 떠돌던 양이 발견되었습니다. 구조대가 무성한 털을 깎아 주었는데, 털 무게가 무려 35kg에 달했습니다. 이 무게는 몸 무게보다 더 무거운 수치로 양털 스웨터를 61.3벌, 성인 남성용 양말 490켤레를 만들 수 있는 분량이라고 합니다.
저는 이 양의 사진을 보고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털을 생산하기 위해 이 양은 털갈이를 하지 않기 때문에 놔두면 털이 계속 자라 목숨을 위협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필립 켈러라는 분이 쓴 “양과 목자”라는 책이 있는데, 영어 원제는 “시편 23편에서 본 목자” 라는 제목입니다. 그는 동아프리카에서 선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현지 목자들의 틈에서 자라났다고 합니다. 그리고 청년 시절에는 약 8년 동안 양의 주인과 목자로 살았는데 양을 실제로 기르면서 관찰한 것을 기반으로 이 글을 썼습니다.
양은 다리가 짧고 몸뚱이가 커서, 짧은 다리가 잘 균형을 잡지 못합니다. 그리고 결정적인 것은 혼자 일어서는 것이 너무나 힘듭니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야지 일어설 수 있습니다. 그래서 양을 치는 목자의 일 중에 하나는 이 넘어진 양을 잡아 일으켜 세우는 것이 목자의 주된 일입니다. 목자가 양떼를 이끌고 가다가 항상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이 양을 세는 것입니다. 그래야 이탈한 양을 확인하고, 조치를 취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양을 치는 목자는 항상 셈을 하다가 숫자가 모자라면 반사적으로 양이 어디에서 넘어져 있겠구나! 라고 생각하고, 급하게 넘어진 양을 찾아 갑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누가복음 15장 4절에서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다니지 아니하겠느냐” 라고 말씀하신 것은 유목문화에 익숙한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는 쉽게 이해가 되는 구절입니다.
길을 잃거나, 목자로부터 멀어진 양에게 제일 위험한 일 중에 하나는 ‘넘어지는 것’입니다. 넘어진 양의 경우 위에 게스가 찹니다. 우리가 물구나무서기를 하거나, 엎드리면 속이 답답하고, 얼굴이 노래지는 것처럼, 양들도 같은 증상을 가지게 됩니다. 그런데 양은 이렇게 넘어져서 뒤집히면 다리를 하늘로 향하고, 위기를 모면하려고 필사적으로 다리를 움직이게 되는데, 이렇게 되면 숨이 차고, 혈액순환이 되지 않아 위급한 상태가 되어집니다. 이스라엘 같이 광야이고, 더운 곳이면 3-4시간 만에 양이 죽을 수가 있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 목자는 넘어진 양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특별한 경우에 넘어지는 양들이 있지만, 오랫동안 양을 치는 목자들은 잘 넘어질 양들을 대충 짐작을 합니다. 주로 잘 넘어지는 양들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특징이 있다고 필립켈러는 이야기를 해 주고 있습니다.
첫째는 몸이 우둔하고 살이 많이 찐 양들이 잘 넘어집니다. 물론 양을 고기로 사용하려면 살을 찌워야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살이 너무 많이 찐 양들은 짧은 다리가 잘 지탱해 주지 못하기 때문에 잘 넘어집니다. 이런 경우를 위해서 목자는 양에게 주는 사료를 조절합니다. 먹는 것을 조절해서 양이 너무 둔하지 않게 만듭니다.
둘째는 양의 털에 이것저것 더러운 것들이 많이 붙어 있거나, 양털이 너무 많이 나고, 적절하게 잘 깎지 않으면, 그 털에 이런저런 이물질이 붙어서 몸을 무겁게 해서 쉽게 넘어진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새끼를 벤 암양이 잘 넘어집니다. 아무래도 뱃속에 있는 새끼 양으로 몸의 균형을 잃기 쉽습니다. 그런데 목자의 입장에서는 이 새끼 밴 암양이 넘어지면 손실이 많습니다. 그 새끼도 같이 위험에 처하기 때문에 목자는 될 수 있는대로 암양이 넘어지지 않게 많은 신경을쓰게 됩니다.
그래서 항상 양과 함께 이동시에는 양들의 숫자를 세고, 그 양들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살피는 것입니다.
적용) 요즘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릴까를 생각하고 조심합니까? 아마도 제일 중요한 것을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신경을 많이 쓸 텐데, 요즘 시대에는 많은 분들이 공감하시는 것이 ‘핸드폰’을 잃어버릴 것에 대해서 염려를 많이 하십니다. 핸드폰 안에 중요한 정보들이 다 들어 있고, 잘못되면 개인정보와 사진과 여러 메모들이 한 번에 다 사라지고, 주은 사람이 그것으로 잘못된 일을 하게 되면 치명타가 되기 때문에 늘 조심합니다.
또 무엇을 잃어버릴까 염려를 하십니까? 아마도 “건강”이 아닐까 싶습니다. 워낙 많은 사고와 질병들이 우리 주변에서 잃어나기 때문에, 남의 이야기가 아닌 나의 이야기가 되지 않도록 건강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늘 주의를 합니다.
사람마다 다양하게 무언가를 잃어버리지 않도록 우리는 늘 조심하고, 신경쓰고, 주의를 합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 우리는 “무엇을 잃어버릴까를 주의할 까” 라고 생각해 보았는데, 바로 즉시로 답변은 우리 주변에 ‘잃어버린 양’, ‘영혼’ 이라고 이야기를 하고는 있지만 삶속에서는 적극적으로 양떼를 지키는 목자처럼, ‘잃어버린 양’을 생각하고 있지는 않다는 것입니다. 핸드폰이나 건강은 잃어버리지 않으려고 많은 노력을 하지만, 우리 주변에 하나님을 모르고, 주님을 만나지 못해서, 참 목자되신 하나님 앞에 나오지 못하는 잃어버린 양들을 깊게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구체적 적용) 저는 아까 보여 드린 길 잃은 양의 사진을 지난 2주 정도 계속 생각해 보았습니다. 혹시 내 주변에도 저렇게 방치가 되어서 털로 뒤 덮여서 제대로 움직이지도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걷지도 못하는 흉몰스러운 모습으로 지내는 사람이 없는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면서 저 자신에게 질문을 한 것은 “내가 잃어버린 양은 어디에 있는가?” 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해 보게 되었습니다.
저는 지금 한국 세계선교협의회라고 하는 KWMA 라는 곳에서 사역을 하고 있습니다. 이곳은 15개의 교단, 143개의 선교단체, 38개의 부설 및 산하기구가 일하는 곳입니다. 이곳에서 주로 하는 일은 각 회원단체에서 파송한 선교사들이 선교현장에서 선교사역을 잘 감당하도록 돕는 일을 하는 곳입니다. 저희가 매년 중요하게 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한국선교사 파송 통계를 발표하는 일인데, 2019년 통계는 172개국 28,039명입니다. 그런데 이번에 조사한 2020년도에는 조사방법을 많이 바꾸었습니다. 협력선교사가, 이중소속 선교사를 제외했더니, 22,259명입니다. 조사방법이 조금 다르지만 5,780명의 선교사가 줄었습니다. 조사방법의 차이가 있지만, 현장에서는 2016-18년에 중국과 인도 선교사들의 대거 추방으로 실제로 선교사들이 많이 줄었다는 짐작을 했었습니다. 그리고 2020년 코로나로 전체 선교사의 1/3 정도가 한국에 귀국을 해서 다시 선교지에 나가기가 쉽지 않아서 많이 줄었을 것이라는 예상은 했었습니다. 2020년 통계에서 분명하게 제시된 통계자료가 하나가 나왔는데, 2020년 한 해 동안 사역을 중단하거나 단체에서 탈퇴한 선교사는 1.49%로 집계되었는데, 2020년 집계된 22,259명에 적용시켜보니 340명의 선교사가 중도 탈락을 하거나, 사역을 포기 한 것으로 보고가 되었습니다.
다들 제 동료들이고, 선교 현장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은혜와 강력한 부르심으로 인해 웬만하면 선교사의 사명을 감당하는 분들이 많은데, 너무나도 많은 선교사님들이 선교사역을 중단했습니다. 총회 사무총장으로 섬기시는 변창배 목사님이 한 번 연구를 했다고 합니다. 우리 교단에서 선교사가 되기까지 교육과 훈련과 모든 비용을 추정해 보니, 1인당 2억 정도의 비용이 들어 간다고 강의 때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귀한 선교사들이 작년 한 해 동안 340명 정도가 선교를 중단했다고 합니다. 물론 통계이지만, 마음이 참 아펐습니다.
지난 연말에 최근 코로나19로 어려움을 당한 선교사님들 100명 정도를 추천해 달라고 해서 서류를 준비한 시간들이 있었습니다. 키르키즈의 어떤 선교사님은 이슬람교도가 예배당에 불을 질러서 교회가 완전히 다 타버렸습니다. 범인을 알고 있지만, 추가 범행으로 성도들이 다칠까봐 그냥 두고 지낸다고 하십니다.
필리핀의 어떤 여성 선교사님은 25살의 나이에 선교사로 파송되어 사역하던 중 29세의 나이로 남편 선교사를 불의의 교통사고로 잃고도 두 아이를 키우며 자신이 개척한 산지 교회를 지금까지 15년 동안을 여성 선교사로 혼자 지키며 사역한 선교사님이 계십니다. 현재 코로나 19로 선교비의 어려움과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한국으로 돌아왔으며 경제적 어려움으로 물류회사에서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다고 전해 왔습니다.
더 많은 어려운 선교사들의 이야기를 매일 매일 듣고 있습니다.
개인적 적용) 저에게는 어쩌면 이 분들이 잃어버린 양과 같다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제가 하는 일이 선교사들이 선교를 잘 하도록, 사역 가운데 넘어지거나, 길을 잃지 않도록 잘 도와 주고, 지켜 주어야 하는 일이 제 일인데, 저는 이 일을 제대로 잘하고 있는가?를 되돌아 보았습니다. 처음에 보여 준 길 잃은 양의 모습처럼, 우리 선교사님들 가운데,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이 생겨서, 정말 귀한 사역임에도 불구하고, 이 길을 포기하고, 중단하려는 선교사님이 혹시 계시지 않은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선교후원이 중단이 되고, 건강에 문제가 생기거나, 추방이나 비자거부를 당하거나, 선교사 가정에 자녀가 문제가 생기거나 어려움으로 어딘가에서 지쳐 있거나, 낙심된 선교사님이 계시지 않은지, 그런 선교사님들에게 제가 어떻게 작은 도움이라도 드릴 수 있는지를 찾는 것이 제 일이라는 생각을 깊게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정말 그 선교사님들 곁에서 제일 힘들고 어려울 때, 힘이 되어 주어야겠다는 생각을 이번 사순절 기간에 다시 한 번 되짚어 보게 되었습니다.
성도의 적용) 여러분들에게는 어떤 잃어버린 양이 있으십니까? 여러분의 삶의 현장의 가까운 이웃이나, 동료 가운데에서 이 길 잃은 양과 같은 모습으로 방치된 사람이 혹시 없으십니까? 돌봄을 받아야 됨에도 받지 못하고, 어딘가에서 울고 있는 우리의 이웃이 없습니까? 특히 코로나로 인해 생계의 위협을 받아 낙심한 우리의 이웃이 없습니까? 큰 마음을 먹고 개업한 가게를 제대로 영업 한 번 해 보지 못하고 폐업을 해야 하는 분들의 이야기가 주변에서 들려 오지 않습니까?
열심히 일해보려고 나가던 회사에서 근무 일수를 줄이고, 일을 줄이더니, 어느날 해고 통지서를 받고, 좌절한 가장의 이야기가 우리 주변에 없습니까?
많은 가게들이 문을 닫게 됨으로 수 많은 청년들의 아르바이트들이 사라져서, 학교를 포기한 청년 대학생들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습니까?
뉴스와 신문을 통해서 들려지는 이야기들이 먼 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오늘 우리 주변에서 흔하게 일어나는 일이 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저는 코로나 19로 집안에만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도, 호주에서 길 잃은 양과 같이 덥수룩한 털에 덥혀서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게 방치되어 있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되었습니다. 좌절과 우울과 절망으로 길을 잃은 사람들이 너무나 많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기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우리 교회는 무엇을 해야 되겠습니까?
2. 눅 15:5,6을 보면 “또 찾아낸즉 즐거워 어깨에 메고 집에 와서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나의 잃은 양을 찾아내었노라 하리라”라고 했습니다. 저는 여러 성화중에 이 그림을 너무 좋아합니다. 목자가 잃은 양을 찾아오는데, 그 양은 길을 잃어버리고, 지쳐서 제대로 걸을 수도 없는 상태가 되어서, 결국 목자가 어깨에 메고 와야만 되는 상황을 묘사한 이 그림이 너무 좋습니다.
찾은 자의 기쁨이 있습니다.
예화) 신길동에 작년 12월에 이사를 와서 이제 3개월 정도 되어집니다. 처음에는 뭐가 뭔지 하나도 찾을 수 없었는데, 하나씩 하나씩 찾아가고 있습니다. 전에 살던 곳에는 집 앞에 바로 천이 흘러서 왕복 2km 정도를 예쁘게 잘 다듬어 놓은 곳이 있었습니다. 거의 매일 산책을 했었는데, 이사를 겨울에 와서 그런지 잘 다니지를 못했었습니다. 운동을 제대로 못해서 답답하고, 아쉬웠습니다. 그런데 이제 하나씩 산책로들을 찾기 시작했습니다. 1코스는 교회 위 해군호텔 아래 공원을 한 바뀌 돌고, 힐스테이트와 파크자이 사이로 난 길을 쭉 따라서 보라매 공원을 향해서 가서 공원을 한 바뀌 돌고 옵니다. 보라매 공원에 작은 호수에는 가끔 분수쇼도 합니다. 너무 좋습니다.
2코스는 해군호텔을 넘어서 SK 뷰 아파트를 지나서 다이소를 넘어서 대방공원을 올라서 서울시내 전경을 보고, 돌아옵니다. 산자락을 넘어가서 여기도 경치가 좋습니다. 마지막 3코스를 찾은 곳은 집에서 대신시장으로 내려가서 신길역으로 가서 오른쪽 샛길로 들어서면 샛강이 시작이 됩니다. 여기서부터 산책을 해서 여의도 한강고수부지에 진입하면 요트들이 있는 마리나 여객 터미널을 봅니다. 외국의 유명한 항구 같이 좋습니다. 그리고 국회의사당을 보면서 여의도 공원을 걷기 시작합니다. 곳곳이 너무 잘 꾸며져 있습니다. 이 3코스는 좀 깁니다.
좋은 산책로를 발견한 것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전에 살던 일산에서 걷던 길도 좋았는데, 새롭게 뚫은 길들을 발견하고, 더 좋아서 미련이 없습니다. 사람 마음은 간사한 것 같습니다. 더 좋은 것을 찾으면 이전 것을 잃어버립니다.
적용) 그런데 저도 좀 반성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사순절인데, 주님은 우리를 위해 자기의 생명을 버리고, 잃어버린 한 영혼인 우리를 찾으러 오셨는데, 우리는 주님을 위해 잃어버린 영혼을 산책로 찾듯이 간절함으로 찾았는지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내가 정말 적극적으로 잃어버린 영혼을 찾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 던져졌을 때, 부끄러웠습니다.
더불어 나를 찾으셨던 주님 앞에, 나 자신은 주님을 제대로 찾고 있는지도 되물었습니다. 돌아보니, 잃어버린 양도 제대로 찾지 않고, 주님도 제대로 찾지 않을 때가 간혹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주님이 주신 기회들을 잘 얻을 수 있는 기회와 시간이 많았음에도 놓치는 시간이 더 많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는 가운데 정말 중요한 것을 놓칠 수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성경적 예화) 사도행전 9장에는 사도 바울의 회심 사건이 나옵니다.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예수님을 만나고, 180도 바뀌어지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전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를 박해 하는데 제일 앞장 섰던 바울인데, 이제 그가 예수님을 따르는 자가 되었는데, 중요한 것은 바울의 이전 행실을 보고, 바울이 교회 공동체에 들어오는 것을 의아해 하고, 받아 들이지 않았던 사람들이 대다수였습니다.
사도행전 9:20-26을 보면 “(바울이)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전파하니 듣는 사람이 다 놀라 말하되 이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이 이름을 부르는 사람을 멸하려던 자가 아니냐 여기 온 것도 그들을 결박하여 대제사장들에게 끌어 가고자 함이 아니냐 하더라.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을 당혹하게 하니라. 사울이 예루살렘에 가서 제자들을 사귀고자 하나 다 두려워하여 그가 제자 됨을 믿지 아니하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이라면 쉽게 바울을 받아들일 수 있겠습니까?
바울의 고소로 감옥에 갔던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이로 인해 생계를 잃은 사람, 가장을 잃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바울의 이런 행동으로 뼈에 사무치는 원한이 있던 사람들도 많았을 것입니다. 결코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사람이였습니다.
그런데 사도행전 9:27에는 “바나바가 데리고 사도들에게 가서 그가 길에서 어떻게 주를 보았는지와 주께서 그에게 말씀하신 일과 다메섹에서 그가 어떻게 예수의 이름으로 담대히 말하였는지를 전하니라” 라고 했습니다.
이 바나바가 누구입니까? 행 4:36,37을 보면 “구브로에서 난 레위족 사람이 있으니 이름은 요셉이라 사도들이 일컬어 바나바라(번역하면 위로의 아들이라) 하니 그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행 11:24을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라고 했습니다.
바나바는 초대교회 당시 성품, 인격, 재정적인 면에서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고, 존경과 신뢰를 받던 사람이였습니다. 이런 그가 당시에 부담이 되던 바울을 교회로 들어오도록 길을 열어 줍니다. 바나바가 볼 때 바울은 우리가 처음 사진에서 보았듯이 길 잃은 양과 같이 방치된 한 사람이였습니다. 좋은 가문에서 자라고, 많이 배우고, 자기 열심히 뭔가를 했다고는 하지만, 그리스도안에서 볼 때는 잃은 양이였습니다. 다듬어지지 않고, 거친 바울은 바나바가 동역함으로 그를 신약성경 시대에 가장 중요한 교회의 일꾼으로 사용되도록 길을 열어 줍니다.
적용) 많은 사람이 땅끝까지 가서 복음을 전해야 한다고,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땅끝은 멀고 긴 여정의 외지고 모르는 곳에서 시작이 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나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땅끝이 시작이 됩니다. 바나바는 바로 옆에 있는 땅끝인 바울을 주께로 잘 인도했을 때, 그가 변하여 진짜 땅끝으로 가는 사람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는 때로 땅끝을 가기 위해 너무 목표를 멀리 잡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은 우리의 땅끝은 아주 가까운 곳에서부터 시작이 된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집 주변에 지나가는 사람들, 가게에서 일하시는 분, 식사하러 가는 곳,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는 사람이 어쩌면 우리가 놓치고 있는 땅끝이 될지도 모릅니다.
잃어버린 양에 대한 설교를 할 때 60-70대 어르신들이 가장 가슴 아파하는 땅끝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자기 자녀들이 주께로 못 나올 때, 너무 너무 아파하십니다. 너무 먼 땅끝을 보다가, 가장 가까운 땅끝의 시작을 놓쳤습니다. 그리스도인으로 좋은 모범을 보이고, 바나바와 같이 바울과 같은 잃은 양들을 교회로 잘 인도했어야 하는데, 놓쳤습니다. 자녀들이 부모를 주께 인도하는 경우는 많지만, 부모들이 자녀를 인도하지 못할 때가 너무 많습니다. 우리의 땅끝은 멀리 있지 않습니다.
적용2) 또 하나 중요하게 생각해야 하는 것은 ‘누가 핍박자 바울을 위대한 하나님의 사도로, 하나님의 일꾼’으로 사용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누군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과속의 씨는 셀수 있으나, 씨속의 사과는 셀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 주변에 지금 가능이 없어 보이고, 잘 나지 않아 보이고, 별로 기대가 되지 않는 사람처럼 보여도, 심지어는 나에게 별로 도움이 되어 보이지 않는 사람 같아 보여도, 우리는 하나님의 잃어버린 양을 보는 관점을 놓쳐서는 안됩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오셔서 그런 사람들을 만나 주셨습니다. 미국 뉴욕에서 귀한 사역을 하는 팀 켈러 목사님은 그의 책 “인생질문”에서 특별한 해석을 했습니다. 이 책은 미국의 하버드 대학교와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강연한 내용을 정리한 책인데, 최고의 지성인들이지만, 잃어버린 양과 같은 그들에게 목회자로서 복음을 증거합니다. 5장에는 “최초의 그리스도인 막달라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를 합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예수님의 최초의 부활의 증인은 막달라 마리아 였습니다. 성경 전문가들과 역사가들은 모두 한 목소리로 예수님 당시 시대의 여자는 유대법정이나 로마법정에서 증언할 자격이 없었습니다. 가부장 문화에서는 여자의 증언은 신빙성이 없다고 증거 채택이 안 되던 시대였습니다.
N.T. 라이트가 쓴 “하나님의 아들과 부활” 이라는 책에서도 예수님 당시 유대인과 헬라인과 로마인들은 육체 부활을 불가능한 일로 보았고, 특별히 헬라인들은 육체를 포함한 모든 물질은 약함과 악의 근원으로 보았습니다. 당시 보편적인 생각은 구원이란 ‘영혼이 육체에서 해방되는 일’이라는 사고가 깔려 있는 상태에서 예수님의 부활, 그것도 법정 증인이 안되는 여인에게, 특별히 마가복음 16:9을 보면 “예수께서 안식 후 첫날 이른 아침에 살아나신 후 전에 일곱 귀신을 쫓아내어 주신 막달라 마리아에게 먼저 보이시니” 라고 했습니다.
정말 부활의 증인으로는 적절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팀 켈러 목사는 ‘그리스도인’을 정의 할 때, “예수께서 죽으셨고, 죽은 자 가운데 살아나셨음을 믿는 자” 자입니다. 이 정의에 가장 충족이 되는 첫 번째 사람은 바로 막달라 마리아 뿐이였습니다.
세상이 볼 때는 약해보이고, 연약해 보이고, 별 것 아닌 것 같지만, 우리 주님께서는 ‘그 한 사람’을 귀히 보고 계셨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는 “그 한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내세울게 아무것도 없는 것 같지만, 주님이 찾으시는 “그 한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결 론
마지막에는 초반에 보여 드린 양이 털이 깎여 있는 모습을 보여 드리고 싶습니다.
처음과 비교해 보면 얼마나 속이 시원합니까?
이 사순절, 특히 코로나의 긴 침체기로 길을 잃은 양과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하나님께서 오늘의 시대 이렇게 좌절하고, 낙망하고, 속상한 사람이 많아서 소망을 잃어버린 시대에 우리에게 주신 사명이 무엇입니까?
우리 주변에 지쳐 쓰러져 넘어진 양들이 무수히 많음에도, 우리가 그냥 지나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예) 지난 월요일에는 비가 하루 종일 내렸습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니 눈으로 바뀌고, 날씨가 갑자기 추워졌습니다. 밤 11시 경에 자동차 네비게이션이 잘 안되어서 여러 편의점에 SD 카드를 사러 돌아다녔습니다. 너무 늦었고, 편의점에서는 안 파는 물건이였습니다. 허탕을 치고 돌아오는데, 언덕 길 중앙에서 뭐가 꿈틀거렸습니다. 자세히 살펴보니 술취한 분이 길바닥에 쓰러져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칠 수 있었는데, 날씨가 너무 추워져서 저렇게 그냥 바닥에서 자면 생명이 위험할 수 있겠다 싶었고, 지나가는 차가 그냥 치고 넘어갈 정도로 잘 분간이 안되는 모습으로 엎드려 있었습니다. 그냥 지나치려다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생각이 났습니다. 그리고 토하고, 취한 사람이지만 이 분도 누군가의 아바지이고, 이렇게 술을 진탕 마신 것도 얼마나 괴로운 일이 있으면 마셨겠나 싶어서 지나치지 않고, 119에 신고하고 도움을 요청했습니다. 그리고 그냥 가려다가, 119가 잘 오는지 기다려 주었습니다. 경찰도 같이 왔는데, 사건 정황을 잘 설명해 주었습니다. 거기까지 진행되는데, 40분 정도의 시간이 소요가 되었습니다.
혹시 그 한 사람이 생명을 건지고, 주님을 만나서, 바울처럼 될지, 막달라 마리아처럼 부활의 첫 증인이 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그런데 지금 우리 주변에 그렇게 길 잃고, 좌절하고, 바닥에 쓰러져서 죽고 싶어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위에 너무나 많이 있습니다.
우리가 같이 아파해 주고, 울어주고 웃어주어야 할 사람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이번 사순절, 정말 보잘 것 없는 나를 위해 이 땅에 오셔서 길 잃은 나에게 오셔서 길과 진리와 생명이 되어 주셔서, 나에게 사명도 맡기시고, 그 일을 감당하도록 우리에게 모든 것을 축복해 주시는 주님의 사랑을 깊이 되새기는 은혜의 시간이 되어지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